자존감 도서관/자존감 기르기

미움받을까 두려워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

웰빙팡팡 2022. 9. 4. 11:49

유난히 밝고 호의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등장할 때부터 남들의 시선을 끌고, 사람들도 관심을 보입니다. 처음 만날 때 그는 평생 우정을 함께할 것처럼 행동합니다. 내게 반하기라도 한 듯 무척 친밀하게 대하고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기도 합니다. 나도 금세 그와 친한 사이가 된 것 같죠. 그런데 막상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우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짜 친해졌다는 느낌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좋은 모습만 보이면 쉽게 친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친한 관계란 나쁜 모습도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어  vs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타인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존감의 첫 번째 요소이지요.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 가장 쉽게 떠올리는 방식은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 받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랑을 못 받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vs  불행해지지 않고 싶어

원하는 것을 정해놓고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계속 원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은 공부 잘할 때의 자기 모습을 늘 떠올리며 그 모습에 따라 행동하려고 합니다. 기대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도 그렇습니다. 다소 실망하고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모범생다운 결론을 내립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하고 다음 시험에는 보완하려고 노력하죠.

 

반면 원치 '않는' 것을 정해놓고 그곳으로 ''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좀 복잡합니다. 공부 못하는 걸 피하려는 사람의 경우 ,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공부 잘하는 걸 목표로 한 사람, 즉 '공부를 잘하면 학교에서 인정받는다'라고 믿는 경우와는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공부 못하는 걸 피하려는 사람은 성적이 조금 떨어지면 자기 모습에 당황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죠. 평소 그렸던 부정적인 이미지에 자신을 갖다 붙입니다. '성적 떨어진 사람 =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 나' 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물론 한 번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거나, 늘 기대한 대로 성적이 나온다면 두 경우 간에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생 대부분은 굴곡이 있고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문제는 이때 생깁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목표와 불행해지지 않고 싶은 목표 간의 차이는 걸림돌을 만났을 때 드러납니다.

 

부정형 목표는 두려움을 부른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못 받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 어떻게 될까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면, 뇌는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을 떠올립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관심을 못 받는 상황, 또래에게 따돌림당하는 경험,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서도 험담의 대상이 되고 외로움에 빠지는 상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늘 밝은 웃음을 짓고, 남들이 관심을 갖고 좋아할 만한 외모와 행동을 취하는데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련은 오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도 모두가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개팅 상대에게 퇴짜 맞기도 하고,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부정형 목표가 세워져 있던 사람들은 나쁜 생각을 떠올립니다.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는 이유를 떠올리면서 부정적인 상황에 집중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문제점에 집중합니다. 누구에게 화났던 일, 비도덕적인 욕구와 욕심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나에 대해 실망하게 될 거야' '나를 무시하게 될 거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여기에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난 특이해'라는 생각마저 다가오면 폭탄에 불을 댕기는 꼴입니다. 자기만 특이하게 문제가 있어서 특히 사랑받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가까이에 쌓아두었던 폭탄이 터지기 쉽습니다.

 

두려움은 예방주사가 아니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설득이나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감정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대화란 논리적인 과정인데 "그냥 불안해. 사람들은 실망할 거야"라는 말에는 논리적인 대응과 설득이 불가능하죠.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사건 때문에 두려움이 폭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직장 상사가 한두 번 나무랐을 뿐이건만 그렇게 서럽고 불안할 수가 없고, 모두 자신을 싫어한다고 되뇌며 울컥 눈물이 솟습니다. 억울함과 분노도 동반한 감정이죠.

 

이들은 자신이 지적당한 것이 업무가 아닌 인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미워할까 생각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한테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은 더 심각합니다. '내가 봐도 나는 일을 참 못해. 혼나는 게 당연하지' '난 끝장이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다 알아버린 거야'라며 자신을 낙인찍습니다.

 

자존감 결여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원인이 되지만 그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관계에서 트러블을 경험하고 그걸로 속상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깎아내리면 그렇게 됩니다. '나는 쿨하지 못해' '프로답지 못해' '한번 혼난 걸로 이렇게 오래 꿍한 거 보면 너무 감정적이야'라며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식입니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두려움이 폭발한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계속 예방주사를 놓는다고 생각합니다. "너 이러면 사람들이 싫어해. 외톨이가 될 거야"라며 핀잔을 줍니다. 그 순간에는 아이가 두려워해도 그래야 사랑스러워지려고 노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방주사가 아닙니다. 거절이라는 병균이 침입했을 때, 항체가 되어 싸워야 할 자존감을 소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이 핵심 감정이 되어 폭발해버리고 맙니다. 자기 머릿속의 오류들을 수정할 기회가 날아가버리는 셈입니다.

 

당당한 사람이 사랑스럽다

모든 이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도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고, 칭찬받고 싶지만 실망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아름다움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내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남들이 알면 놀랄 욕망도 있고, 욕심도, 질투와 시기도 숨어 있습니다. 자신감이 결여돼 있기도 하고, 기대고 싶은 의존 욕구도 있습니다. 다만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수많은 것들을 뭉뚱그려 이드(id)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들에겐 자아가 있고, 그것을 통제하는 선량한 나 즉 초자아가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초자아라면, 그 반대편에는 이드가 숨 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사랑받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드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한테 이드가 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나쁜 학생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포스팅을 하면서 이 내용에 얼마나 공감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저의 이야기를 그대로 써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미움받을까 봐 자신을 단단히 포장한 나머지 어느새 저는 스스로의 감정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혼자가 될까 봐 너무 두려웠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새 학기가 되면 필사적으로 새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친절하게 웃고 말을 먼저 걸었지요. 어색하고 민망한 것보다 쉬는 시간에 혼자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나이 30이 될 때까지 저는 그런 끔찍한 공포에 항상 시달렸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의 부족한 점을 보여주면 그들이 나를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초자아로 자신을 무장했습니다.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늘 밝은 사람처럼, 항상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요. 다른이의 말에 상처받는 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한두 번 나무람에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은 좌절감과 분노와 억울함에 휩싸였습니다. 그것이 너무 감당하기 클 때는 혼자 뺨을 때리며 자해를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 욕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거절당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저에게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몇 년 전보다는 공포가 많이 사라졌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요. 하지만 여전히 제게 남은 강력한 두려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외모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뚱뚱하고 못생기고 허접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욕하면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온 두려움은 제대로 거울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길을 가다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공황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쇼윈도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거울을 슬쩍 보다가도 이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두려움이 맞습니다. 엄마는 우리 자매에게 항상 이런 말을 반복했습니다.

 

 

"배 좀 봐라 배. 아프리카에 사는 멍청한 뚱뚱한 여자같아"

"쟤 엉덩이랑 다리 좀 봐. 어떡하니 쟤"

"너는 무조건 그 거대한 하체를 가릴 상의를 입어야 해"

"너는 얼굴이 특징이 없게 생겼기 때문에 안경이라도 써야 해"

"너희 둘보다 내가 제일 날씬해"

 

 

저는 그 인격모독적인 말들을 맞받아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비난들을 흡수하며 제 자신을 혐오할 뿐이었죠. 아마 엄마는 저를 위해 자신만의 충격요법을 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언행은 그저 제 자존감을 소지시킬 뿐이었죠. 두려움과 불안만 키웠습니다. 결국 저는 제 자신을 너무 혐오한 나머지 거울을 보면서도 고개를 돌려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쇼윈도에 비친 제 자신을 보고 공황이 찾아와서 얼른 집에 돌아와 숨을 고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식은땀이 흘러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던 도중 거울을 바라봤습니다.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날 그렇게 한마디 했습니다.

 

 

"정말 미안해"

 

 

 누군가가 저를 보자마자 보기 싫어서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면 얼마나 큰 수치스러움을 느낄까요. 저는 제 자신에게 그렇게 모멸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성형을 하고 살을 10kg 정도 빼면 그땐 고개를 안 돌릴 수 있으려나요? 설사 그때가 되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제 자신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제 자신에게 미안했습니다. 남들에게 미움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둘째치고 저는 가장 먼저 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미워하는 순간이 생길 때마다 최선을 다해 제 자신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구실 없이 말이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합니다.